물어 이르되 「승려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거늘 [거듭하여] 일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불도를 중흥시켜 정법을 오래 머무르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하기에
이르기를 「바야흐로 지금의 천자께서 불도를 중시하고 도교를 숭상하며 유학을 시행하여 태평성대에 이르렀으니 이미 중흥을 이루었다 하겠거늘 일개 비구가 역량이 얼마나 미칠 수 있겠기에 불도를 중흥시키겠다고 말하는가?」 하므로
답하여 이르기를 「거듭 그 중흥을 돕고자 할뿐입니다.만일 석씨의 아들로써 법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지 않으며 과목의 학문에 힘쓰지 않고 근본되는 기원을 밝히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제왕의 중흥에 부응하겠습니까?」 하였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그대는 무슨 힘이 있어 정법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겠는가?」 하니
답하여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하시기를, 법을 알고 논장論藏을 알아서 보호하여 가지고 거두어들인다면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으며,또 말하기를 「모든 선사들이 이미 널리 저술하였거늘 하필 그대가 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므로
답하여 말하였다.
「옛사람들의 저술은 활용하기에 좀 미흡한 듯 하였으니, 세 가르침이 순환하여 마쳤다가 다시 시작하며 한 분이 윗자리에 있음에 높아도 위태롭지 않음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 분이 있는 까닭에 세 가르침이 흥성하게 되고, 세 가르침이 있는 까닭에 한 분의 다스림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무릇 유교는 삼왕 이래로 베풀어 씀에 이치에 합당하였으며, 도교는 오제 이전에 곧 무위無爲의 도에 가만히 부합하였습니다. 옛적에 사마천의《사기》에서는 도道를 올려놓아 아홉 부류의 위에 두었고, 반고의《한서》에서는 유교를 끌어올려 예문지의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자장은 그 질박한 데로 돌이키고 그 순박한 데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니 황제의 도를 숭상함이요, 맹견은 그 어짊을 근본으로 하고 그 의리를 본받을 것을 생각하였으니 왕도를 행한 것입니다. 하나라와 상나라와 주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수 백천년이기에 만약 황제와 노자의 도를 사용하여 치료한다면 곧 급한 병에 더딘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의가 엷어지고 예절과 형벌이 생겼으니 그 예절을 넘어서고 그 형벌을 건너뛰면 곧 유씨儒氏는 팔짱을 끼고 있을 것입니다.
석씨의 문중은 베풀어 쓰기를 두루하여 자비로써 포악함을 변화시키고, 희사함으로써 아끼고 탐냄을 변화시키고, 평등으로써 원수와 친함을 변화시키고, 인욕으로써 성냄을 변화시키며, 사람은 죽더라도 신명은 멸하지 않음을 알고 또한 응당의 사후세계에 도달하더라도 업을 받아 환생함을 알아서 천당으로써 상을 주고 지옥으로써 처벌함은 마치 흙을 떨어버린 거푸집과 같고 쇠를 부어 만든 모형과 같습니다. 삐뚠 거푸집과 새는 모형에 물건을 쏟아 부으면 반드시 볼품없는 모양을 이루고 좋은 모형과 훌륭한 거푸집으로 형상을 전하면 반드시 그 단정하고 엄밀함을 이루게 될 것이니, 이러한 일은 입으로만 얘기하는 바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눈으로 목격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왕이 받들어 믿고 많은 신하들이 마음으로 귀의함이 마치 풀 위로 바람이 불자 나란히 한쪽으로 쏠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곁으로 노씨의 말씀에 능히 기대고 겸하여 유가의 말씀에도 의지한다면 지혜를 이룸에 있어서 마치 세 사람의 어리석은 이를 기다리는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해서는 여러 성현들을 함께 좇아야 합니다.
온 천하가 부지런히 힘쓰는 풍토를 이루고 종일토록 쉬지않고 나아가는 풍토를 회복하면 만백성을 제어함에 있어 마치 팔이 손을 부리듯 하고 마치 손이 손가락을 움직이듯 하며 혹은 사로잡았다가 혹은 풀어 주었다가 하니 어디에 간들 좋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으면 곧 세 가지 가르침은 바로 한 집안의 물건이요 만승은 바로 한 집안의 주인이 되니 집안을 돌볼 때는 마땅히 편애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편애하면 곧 경쟁이 생겨나고 경쟁이 생겨나면 곧 가르침을 훼손할 것이므로 자신이 그 안에 있으면 자연히 불안할 것이요 자신이 불안하게 되면 곧 그 가르침을 훼손하게 될 것이니, 가르침을 훼손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곧 편애함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세 가르침이 화합하고서야 그로 인해 법이 오래도록 머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나라 시황제가 유교의 경전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땅에 묻은 것은 그 일이 이사로부터 나왔고, 후위 때 사문들을 참살시킨 것은 그 주장이 구겸지와 최호에게서 말미암았으며, 후주의 무왕이 불교와 도교의 두 가르침을 폐하고 자신의 총명을 자랑함에 힘쓴 것은 대개 조정에 바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당나라 무종이 사찰과 불상을 훼손시켜 없앤 것은 도사 조귀진이 유현정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 불법을 비방하고 사문을 무고함에 이주애가 암암리에 도왔으니, 이 네 임금과 모든 신하들이 과보로 받은 영험이 어찌 그리 신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무리에게 받들어 권하오니 서로 경책하고 서로 막아주어 허물이나 과실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왕이 용납하지 않으면 법이 어디를 좇아 세워지겠습니까. 하물며 도교의 학문은 보배를 지킴에 천하의 앞에 나서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예절을 넉넉히 하고 화합해 나아감이 사문에게 어찌 방해가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일체를 공경하여 믿어라 하신 말씀에 마땅히 부합하여 노자를 믿는 것은 앞선 성인이기 때문이며 공자를 믿는 것은 앞선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성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석가의 가르침을 드러내어 선양하고 서로 더불어 나란히 행함으로써 임금님을 복희씨와 황제씨의 위에 놓이게 하였겠습니까. 만일 이 말을 어기면 비유컨대, 무뢰한 자제들이 까닭 없이 겨루어 다투다가 그 부모에게 누를 끼치고 가산을 탕진한 뒤 형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세 가지 가르침의 큰 도를 훼손하는 것은 곧 일시적인 작은 과실로서 일식이나 월식 같기에 어찌 밝음을 잃어버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대는 보지 못하였습니까? 진나라 때 백가의 서적을 불태웠지만 성인께서 미리 집의 벽 속에 갈무리하여 두었고, 유생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전멸케 하였으나 양웅과 사마천 및 두 대씨가 서로 연이어 태어나니 어찌 일찍이 살아남은 자가 없었겠습니까. 양 무제가 도교를 버리자 후위가 발흥하였으며, 탁발씨가 승려를 주살하거늘 그 자손이 거듭하여 [불교를] 진흥시켰고, 후주에서 두 교를 훼멸시키자 수나라 양견이 이를 부활시켰으며, 무종武宗이 석가 문중을 무너뜨리거늘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선종宣宗이 열 배로 이를 부흥시켰으니, 손바닥을 기울여 어찌 능히 하수河水와 한수漢水의 흐름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주먹을 내질러 호랑이나 코뿔소의 사나움을 말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승려로서 도안 만한 이가 없으나 도안이 습착치와 더불어 교류한 것은 유교를 숭상한 것이요, 승려로서 혜원 만한 이가 없으나 혜원이 육수정을 전송할 때 호계를 지나쳤으니 이는 도교를 중시한 까닭입니다. 내가 두 고승을 사모하며 유교를 좋아하고 도교를 중시하니 석가의 자손들이 오히려 혹 그르다 하겠지만, 내가 이미 다른 이들을 중시하는데 다른 이들이 어찌 나를 경시하겠습니까. 청하건대 도안과 혜원이 행한 일을 믿어 그것을 본받으십시오.《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베니 그 법다움이 멀리 있지 않도다 하였으며,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의 운명은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들의 화합만 못하다 하였으니 이를 말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