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대승기신론서문 大乘起信論疏序
당나라 경조부 위국서사 사문 석법장
대저 참된 마음은 허공처럼 깊고 넓어서
통발이나 올가미(筌罤)을 쓰더라도 언어와 상징이 끊어지고,
그윽하고 조짐없는 가운데(沖漠) 희유한지라.
능히 주재함도 주재당함도, 능소에서 경계도 아는것도 잊게되니,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구나.
생하고 머무르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도 작용할수 없는 곳이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니, 과거 미래 현재의 흐름에도 바꿀 수 없구나.
그저 머무르지 않음이 성품으로 삼아서,
물결을 따라 갈래가 나뉘고
미혹과 깨달음을 따라 오르내리고,
원인과 상황에 따라 일어나고 없어질 뿐이구나.
비록 번다하게 일어나 날뛰더라도
마음의 근본에서는 애초에 움직인적 없었고,
고요하고 편안하여 허공같이 뭉치더라도
일찍이 업의 과보와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품을 바꾸지 않고서도 연기하게 하니,
더러움과 깨끗함은 항상 다르고
인연을 버리지 않고서도 진리와 부합하니
범부와 성인이 하나에 이르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면,
물결은 젖는 성품이 달라지지 않고도 움직이는 성품인 까닭에
물이라도 물결과는 구분하는 것이고,
물은 움직이는 성품이 달라지지 않고도 젖는 성품인 까닭에
물결은 물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통하는 것이며
진리의 세계(진제)와 현실의 세계(속제)가 서로 원융하는 것이니,
생사와 열반이 나란히 함께 관통하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때는 (세상사람들) 근기가 성숙되어 다스리기 쉬워서 한 번 내려주시는 말씀에 (달라붙어) 깨닫지 못함이 없었는데,
부처님 큰 스승님께서 입멸하신 후에는 뒤엉킨 낚싯줄(중구난방 가르침)을 달리 부여잡으면서 혹은 삿된 길에 나아가기도 하고 혹은 좁고 쉬운길로 달아나니,
결국에는
집안에 보물창고가 있어도 외롭고 곤궁하게 궁핍을 벗어나지 못하고,
옷 속에 야명주가 있어도 품팔이 하며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구나.
더욱이 대승의 깊은 뜻을 경전에만 묵혀두고 찾지 않으니,
그중 어떤 눈먼 무리들은 다른 길로 내달려 돌아오지 않는구나.
이에 큰 스승이 계시니 그 이름 마명이라.
(불법의) 기강이 이렇게 흐트러지는 것에 분개하시고
(속절없이 허우적거리며) 이렇게 침잠하는 것을 슬퍼하시어
이제 깊은 경전의 묘한 지취를 열어주고자 하시거늘
어두운 갈림길에서 거듭 밝혀주시고
사견의 뒤바뀐 견해(눈동자)를 물리치시며
바른 뜻으로 돌아가도록 하시되,
근본으로 돌아가는 이로 하여금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근본을 돌이켜 멀어지지 않게하시니,
때마침 (대승기신론이라는) 광대한 논서를 지어
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셨다.
기존의 문장들은 뜻이 넘쳐나도 막막한지라.
얕은 식견으로는 엿볼 수조차 없으니
말세의 미혹한 무리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다시 이 기신론을 지으시니
의미는 두터우면서도 문장은 간결하고
알고 수행하는 것 모두를 갖추었다 할만하다.
중근기와 하근기의 무리들은 이로 인해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