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 曾侍郎 天遊 三
[不墮邪見 參商活句]
又
20
老龐이 云 “但願空諸所有언정 切勿實諸所無라”하니 只了得遮兩句하면 一生參學事畢이어늘, 今時에 一種剃頭外道가 自眼不明하고 只管敎人으로 死擖狚地休去歇去라하나니, 若如此休歇인댄 到千佛出世라도 也休歇不得하야 轉使心頭로 迷悶耳니라.
21
又敎人으로 隨緣管帶하야 忘情黙照라하나니, 照來照去하며 帶來帶去에 轉加迷悶이라 無有了期하리니, 殊失祖師方便하고 錯指示人하야 敎人으로 一向에 虛生浪死로다. 更敎人으로 是事를 莫管하고 但只恁麽歇去하라. 歇得來에 情念이 不生하리니 到恁麽時하야 不是 冥然無知라. 直是 惺惺歷歷이라하나 遮般底는 更是毒害로 瞎却人眼이라 不是小事로다.
22
雲門은 尋常에 見此輩하고 不把做人看待호라. 彼旣自眼이 不明이라 只管將册子上語하야 依樣敎人하나니, 遮箇作자麽生敎得이리요? 若信着遮저般底저인댄 永劫에 參不得하리라.
雲門도 尋常에 不是不 敎人으로 坐禪호대 向靜處 做工夫언만은 此是 應病與藥이라 實無恁麽指示人處호라.
23
不見가 黃檗和尙이 云호대 我此禪宗은 從上相承以來로 不曾敎人으로 求知求解하고 只云學道라하나니, 早是接人之詞나 然이나 道亦不可學이라. 情存學道하면 却成迷道라.
24
道無方所 名大乘心이니 此心은 不在內外中間하야 實無方所니 第一에 不得作知解어다. 只是說汝 而今情量處에 爲道나 情量이 若盡하면 心無方所니라. 此道는 天眞하야 本無名字어늘 只爲世人이 不識하야 迷在情中일새 所以로 諸佛이 出來하야 說破此事하사대 恐爾不了하야 權立道名하시나 不可守名而生解也니라.
25
前來所說 瞎眼漢의 錯指示人은 皆是認魚目 作明珠하야 守名而生解者니, 敎人으로 管帶는 此是 守目前鑑覺而生解者요, 敎人으로 硬休去歇去는 此是 守忘懷空寂而生解者요, 歇到無覺無知하면 如土木瓦石相似하리니, 當恁麽時하면 不是冥然無知라하니, 又是錯認 便解縛語而生解者요, 敎人으로 隨緣照顧하고 莫敎惡覺現前이라하나니 遮箇는 又是 認著髑髏情識而生解者요, 敎人으로 但放曠하야 任其自在하고 莫管生心動念이니 念起念滅이 本無實體라 若執爲實則 生死心이 生矣라하나니 遮箇는 又是守自然體하야 爲究竟法而生解者라.
如上諸病은 非干學道人事요 皆由瞎眼宗師의 錯指示耳니라.
26
公이 旣淸淨自居하야 存一片眞實堅固向道之心하이 莫管工夫- 純一不純一하고 但莫於古人言句上에 只管如疊塔子相似하야 一層了코 又一層이니 枉用工夫하면 無有了期하리라. 但只存心於一處하며 無有不得底하라 . 時節因緣이 到來하면 自然築著磕著하야 噴地省去耳리라.
27
“不起一念이 還有過也無잇가?” 云 “須彌山이니라.” “一物도 不將來時如何닛고?” 云 “放下著하라”하니, 遮裏에 疑不破어든 只在遮裏參이언정 更不必自生枝葉也니라. 若信得雲門及인댄 但恁麽參이언정 別無佛法指似人이니라. 若信不及인댄 一任江北江南問王老하야 一狐疑了一狐疑하노라.
증시랑 천유에게 답하다 ③
사견에 떨어지지 말고, 활구를 참구하라
20
방거사 말했습니다.
“가진 것 비우기 바랄뿐이며, 갖고 있지도 않는 것이 실재한다 하지말라.”
이 두 마디만 알게되면 일생을 참선공부가 마칠 것입니다.
오늘 날 어느 머리깎은 외도들은 자신의 안목은 밝히지 못하고 자꾸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면서, 쥐죽은 듯이 그저 쉬라고 쉬라고 합니다. 만약 이같이 쉬기만 한다면 천불이 세상에 오시더라도 쉬지도 못하거니와 도리어 미욱해질 뿐입니다.
21
또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인연따라 가지면서 식정들을 잊고 묵묵히 비추라고 합니다. 오며 가며 비추고, 오며 가며 챙겨도 도리어 더 미욱해져서 깨달을 기약도 없습니다.
조사의 방편들은 자주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잘못 가리켜 보이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헛되이 살다 헛되이 죽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이일을 관여하지 말고 단지 이렇게 쉬어가라고만 합니다. 쉬게되는 때가 오면 알아차릴 식정도 일어나지 않고, 그러한 때가 되어 아득하여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성역력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다시금 사람들의 눈을 멀게하는 해로운 독이니, 작은일이 아닙니다.
22
나 운문은 평소에 그런 무리들은 공부인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목도 밝지 않고 단지 책자에 적힌 말들만을 가지고 틀에 따라 남들을 가르칩니다. 이렇게해서 어떻게 가르쳐 낼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들을 믿는다면 영겁토록 참구하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도 평소에 사람들에게 좌선을 가르치면서 되도록 고요한 곳에서 공부하라고는 합니다만, 이것은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렇게 지시한 적은 없었습니다.
23
보지 않았습니까? 황벽 선사께서 이르시기를
“우리의 이 선종은 예부터 사자상승하여 스승과 제자간에 법이 전해져온 이래로 일찍이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알음알이를 구하라고 한 적은 없었고, 그저 도를 배워라고 말할 뿐이니라.”하셨습니다.
일찍부터 이것이 사람들을 제접하는 언사이지만, 도라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식정이 도를 배우는데 치우치면 도리어 도에서 헤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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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곳이 없는 도를 대승심이라 이름합니다. 이 마음은 안팎이나 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고, 진실로 규정할만한 것이 없는데, 제일 먼저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지금은 식정으로 사량분별하는 곳에서 도를 닦고있지만, 사량분별이 다하면 마음에 방소란 없습니다. 이러한 도는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알지 못하고 식정에서 헤메고 있는 세상사람들을 위한 것이기에 여러 부처님께서 나투시어 이러한 본분사에 대해 설파하신 것입니다. 그대들이 깨닫지 못할까 염려하여 방편을 세워 ‘도’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름에 갇혀서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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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대로 눈먼 이들이 사람들을 잘못 가르키는 것은 모두 생선 눈알을 밝은 구술로 알아 이름에 갇혀 알음알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항상 놓치지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눈 앞을 보이는 것을 고수하여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쉬고 또 쉬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생각을 잊어 공적한 것을 고수하여 알음알알이를 낸 것입니다.
쉬어서 감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마치 흙이나, 나무, 기왓장 돌덩이 같아지는데, 이렇게 되어도 어둡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역시 잘못 아는 것이니, 편의상 묶어주는 말에서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연따라 비추어 살필 것을 가르치면서 나쁜 지각이 현전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으니 이런 것 역시 髑髏情識에 달라붙어서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다만 탁 내려놓고 자재함에 맡기고 일어나는 마음과 흔들리는 생각들을 다스리지 말라하고, 생각이 일어나거나 멸하거나 본래 실체가 없는데 집착하면 실재하게되어 생사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것 역시 자연히 본체를 고수하여 궁극의 법으로 삼아 알음알이를 낸 것입니다.
위와같은 모든 병통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눈먼 스승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26
천유공께선 이미 청정하게 살아오셨고, 진실하고 견고한 한 조각 화두가 있어 조심을 향하고 있으니, 공부가 순일한지 순일하지 안든지 상관하지 말고, 저 옛 조사님들의 말씀 위에 탑을 쌓듯이 한층 한층 올리지만 마십시오. 공부를 잘못하여 깨달을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 마음을 한 곳에 두기만 하면 깨닫지 못할리 없습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축착합착하여, 그 자리에서 돌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7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허물이 있습니까?”
“수미산”
이라 하였습니다.
“한 물건도 온적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려 놓아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의심을 깨지지 않거든, 다만 여기에서 참구할 뿐, 다시 군더더기 가지나 이파리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만약 이 운문을 믿는다고한다면, 다만 이렇게해서 참구할 뿐, 남들에게 보여줄 불법은 따로 없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마음가는대로 강북 강남으로 물어보기도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