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계를 윤회하는 중생의 고통은 불난 집보다도 더한 법이다. 그런 고통을 어찌 참아 그대로 머물러 받으려 하는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엔 없다 부처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부처는 곧 내마음이다.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이 몸은 무상한 것이라,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으면 다시 제 본래의 유소로 환원해 버리지만 한 물건은 항상 신령스러워 천지에 가득하다’고 하였다.
2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길을 잃은 지 오래 되어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 진리인 줄 몰라서 진리라면 항상 멀리 성인들에게서만 구하고, 부처를 찾으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관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소견에 굳게 집착한 채 불도를 구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눕지 않고 언제나 앉아 좌선하며, 하루에 아침 한 끼만 먹으려, 나아가서는 모든 대장경을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모두 닦는다 할지라
도,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단지 수고로울 뿐 아무 이익이 업는 것이다.
3
다만 자기의 마음이 무엇인 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진리를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의 지혜의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중생의 가지가지 허망된 생각이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한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그대로의 부처이다.
4
물음: 만약 불성이 현재 이 몸에 있다고 하면, 이미 몸 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날 리가 없는데 저는 어째서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잘 해석하여 나로 하여금 속속들이 깨닫도록 하여 주십시오.
5
답: 그대 몸에 있는 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가 하루종일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도 알고, 혹 성내고 기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여서 된 것으로서, 그 바탕이 완고하여 감정이 없는데 어찌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하는 그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대(四大)는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또한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또한 법을 설하거나 듣지 못하는 데, 오직 그대 눈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 없는 한 물건 만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 없는 것’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바로 이렇게 불성이 현재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밖에서 헛되이 찾겠는가,
그대가 만약 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옛성인들이 도를 깨친 예를 간략히 들어서 그대의 의심을 풀어주려 하니 그대는 잘 듣고 믿기 바란다.
6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존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품을 본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성품을 보았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도 작용하는 데에 버젓이 나타나고 있지만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왕께서 작용하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으면 그 본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으로 나타납니까?”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그 여덟 군데로 나타나는 것을 내게 설명하여 주십시오.”
“태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서는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서는 들으며, 코에서는 냄새를 맡으며, 혀에서는 말을 하고, 손에서는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서는 온 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마음이 열리었다.
7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은 이렇게 답하였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려 하자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보림해야 합니까?”
“티끌하나 눈을 가리니 허공의 꽃이 어지려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알아차린 바가 있었다.
위에 든 옛 성인들의 도에 든 이야기가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공안으로 말미암아 믿음과 이해하는 바가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8
물음: 스님께서 말씀하신 견성이 진정한 견성이라면 이는 바로 성인이라 마땅히 신통변화를 부리어 보통사람과는 달라야 할텐데 어째서 지금 마음을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9
그대는 경솔히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옳은 것과 삿된 것을 분간하지 못하면 이는 미혹하고 뒤바뀐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퇴굴심을 내어서 도리어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잘못에 떨어지니 그런 사람들은 모두 그대와 같은 의심에 떨어진다.
도를 배우면서 앞뒤를 모르고 진리를 말하면서 근본과 지말을 문간하지 못하는 것은 사견이라 하지, 닦고 배우는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남까지 그르치게 하니 어찌 삼가 하지 않을 수 있을까.
10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많은 문이 있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가장 높고 수승한 근기가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 동안 깨달음에 의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다 곧 깨달아 일시에 마치는 것이니 실로 말하면 이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두 성인의 길이다. 즉,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하여 증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하여 점차로 익혀서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에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이치인즉 돈오이어서 깨달음과 동시에 번뇌가 녹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아 차례에 따라 없어진다’하셨다.
그러므로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깊이 밝히어 말씀하시기를 ‘얼음 언 연못이 온전히 물인 것을 알았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바로 부처인 것을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빌어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잘 흘러 물대고 씻는 공덕을 두루 나타내고 망령됨이 다하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반드시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하셨다. 이렇게 보면 신통변화는 하루에 능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익힘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1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는 신통이 오히려 요망하고 괴이한 일이며 또한 성인에 있어서는 지말적인 하찮은 일이어서 혹 부릴 수 있더라도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한 생각 깨칠 때에 바로 한량없는 묘한 작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고 하니 이러한 견해를 짓는 것은 바로 앞뒤를 모르는 것이며 또한 근본과 지말을 분간 못하는 것이다.
앞과 뒤, 근본과 지말을 모르고 불도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모가나 나무를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미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미리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종성을 끝는 이가 적지 않다. 이미 스스로가 밝지 못하므로 또한 다른 사람의 깨친 것도 믿지 않아서 신통이 없는 사람을 보면 곧 가벼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일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12
물음: 스님께서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들의 길이라 말씀하였는데, 깨달음이 돈오라면 왜 차츰 닦을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만약 점수라면 왜 돈오를 또한 말씀하십니까? 돈오와 점수의 뜻을 다시 설명하시어 남은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13
답: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 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그러므로 돈오라고 한다.
14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히어 공이 이루어지고 오래오래 소질을 길러서 성인이 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면, 어린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는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므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15
물음: 무슨 방법으로 한 생각 기틀을 돌려 자성을 깨치겠습니까?
16
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법이 필요할 것인가.
만약 방법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다. 이미 자신의 눈인데 무엇을 다시 보려하는가. 만약 잃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찌 못 본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애써 알려고 하면 곧 알 수 없으니 다만 아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17
물음: 근기가 아주 높은 사람은 들어서 곧 쉽게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중하(中下)의 사람은 의혹이 있겠으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모르는 사람들을 깨닫도록 하여 주십시오.
18
답: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 않는다.
그대는 깨치기를 기다리는 미혹한 생각을 버리고 나의 말을 들어라. 모든 법(法)은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같은 객관 대상은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그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다. 이 공적(空寂)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서로 은밀히 전한 진리〔法印〕이다.
만약 이 마음을 깨치면, 참으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에 삼계를 초월하고 본집에 돌아가서 단박 의심을 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하나되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인간과 천상의 한량없이 귀한 공양을 받게 된다.그대가 만일 이와 같으면 참다운 대장부라 일생의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19
물음: 제자신으로 본다면 어떤 것이 이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의 마음입니까?
20
답: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다. 어째서 돌이켜 비추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내가 이제 그대 자신에 의거해서 본마음을 바로 가리키어 깨치게 하겠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잘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성내고 기뻐하고, 옳다하고 그르다 하는 가지가지 행위와 동작은 필경 누가 그렇게 하는가? 만약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어째서 금방 명이 끊어진 사람이 몸이 그대로 있는데도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며,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말을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며, 발은 걷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마음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을 만든 사대의 성품은 비어서 거울 가운데 비친 영상과 같고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은데, 어떻게 항상 뚜렷이 알며 밝고 밝아서 한량 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통과 묘한 작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21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 길을 가리키어 원천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그대는 저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 보아라. 거기에도 정말 많은 소리가 있는
가?”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습니다.”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것이 바로 관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간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이 도무지 없다고 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허공과 같지 않는가?”
“원래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것의 본체인가?”
“형상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아라.”
22
이미 모양이 없으면 어디 크고 작은 것이 있겠으며, 크고 작음이 없으면 한계가 어디 있겠는가. 한계가 없으므로 안팎이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도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기 때문에 저것과 이것도 없다. 저것과 이것이 없으므로 가고 옴도 없고, 가고 옴이 없으므로 나고 죽는 것도 없다. 나고 죽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예와 지금이 없고, 예와 지금이 없으므로 미혹하고 깨친 것도 없다. 미혹과 깨침이 없기 때문에 범부와 성인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은즉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다.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므로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옳고 그름이 없기 때문에 일체 모든 이름과 말을 붙일 수도 없다. 이미 다 없어서 모든 감관과 감관의 대상과 망령된 생각 내지는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이름과 말이 다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본래부터 비고 고요하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든 법이 비고 고요한 곳에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는 어둡지 않아 생명이 없는 것과는 다르고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 바탕인 깨친 성품이다.
23
이 마음을 깨달아 지키는 사람은 꼼짝 않고 앉은 채 그대로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사람은 오랫동안 육도(六道)에 윤회할 것이다.그러므로 ‘한 마음에 미혹하여 육도에 떨어지는 사람은 가는 것이요, 흔들리는 것이며 법계를 깨달아 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오는 것이며 조용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비록 미혹하고 깨친 것이 다르지만 근본에서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라고 하셨다.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에 있어서도 더하지 않고 범부에 있어서도 덜하지 않다.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에 있어서도 더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었어도 어둡지 않다’하셨다. 이미 성인에 있어도 늘지 않고 범부에 있어도 줄지 않는다면, 부처와 조사가 어찌 보통 사람과 다르겠는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마음을 잘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대가 만약 내 말을 믿어 의심이 단박 없어지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참되고 올바른 견해를 일으키어 친히 그 맛을 보고 스스로 옳다는 경지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깨달은 자리다. 다시 더 계급과 차례가 없으므로 돈(頓)이라고 한다. 이것은 ‘믿음의 단계에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계합하여 조금의 차이도 없어야 비로서 믿음을 이룬다’한 것과 같다.
24
물음: 이미 이러한 이치를 깨쳐서 다시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 닦아서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까?
25
깨친 후에 점차로 닦는 뜻을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다시 설명하겠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잘 들어라. 범부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섯 가지 세계에 흘러다니어 나고 죽으면서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뒤바뀐 망상과 무명으로 오랫동안 지금의 성격을 형성하여 왔다.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기의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단박 깨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 온 옛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경계를 만나소 즐거워하고, 짜증내며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관 대상에 끄달리는 번뇌가 그 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만약 지혜로써 더욱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단박 깨치면 비록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깊구나.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도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아직도 침노한다’고 한 말과 같다. 또 대혜 종고 스님도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이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 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깨치기 전처럼 유랑하며 윤회를 면치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오래 비추고 살펴서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면 따르지 말고 덜고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서 구경이니, 천하 모든 선지식의 깨친 뒤에 소먹이는 행이 바로 이것이다.
26
비록 뒤에 닦는다 하지만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마음의 성품이 청정한 것을 먼저 깨쳤기 때문에, 악을 끊을 것이 없으며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참다운 닦음이며 참다운 끊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행을 다 닦지만 오직 무념으로 기본을 삼는다’하셨다. 규봉스님도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뜻을 총정리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품이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가 본래부터 스스로 다 갖추어 있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단박 깨치고 그 깨침에 의하여 닦으면 그것을 최상승선, 혹은 여래청정선이라고 부른다.
만약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면 자연히 점차로 백천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문하에 전해 내려온 것이 바로 이러한 선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치는 마치 수레와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으면 안된다.
27
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하고 하셨다.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며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확실히 보면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는 것이니, 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 두려워하라’하셨으며,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다’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관대상에 대한 번뇌가 있지만 다제호를 이룬다. 다만 미혹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비추어 알면 허공의 꽃처럼 실체가 없는 삼계는 바람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이 없어질 것이며, 꼭두각시와 같은 객관세계도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만일 이와같이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비추어 돌아 봄을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가벼워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들어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스러운 행은 스스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 곧 나고 죽음도 끊게 될 것이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들어나면 곧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오직 즐겁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이라 한다.
28
물음: 깨친 후에 닦는 문에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지는 뜻을 아직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에 들게 하여 주십시오.
29
답: 만약 법과 그 뜻을 말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이 모두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강요를 들면, 단지 자기 성품의 본체와 작용의 두 가지 뜻에 불과하니 앞에서 말한 공적과 영지가 그것이다. 선정은 본체며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가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았고, 작용이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았다. 선정이 바로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선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조계스님이 ‘마음에 산란 없음이 자기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기 성품의 지혜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만약 이와 같이 깨달아 고요함과 앎에 자유로워서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게 되면, 그것은 돈문에 들어간 사람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먼저 고요함으로써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성성(惺惺)으로 혼침을 다스린다 하여, 선후로 대치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고요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그는 비록 성성한 것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고요함 만을 취하여 수행함을 면치 못하니, 어찌 깨친 사람의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앎을 떠나지 않고 자유로이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스님은 ‘스스로 깨쳐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애써 노력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특별한 때도 또한 없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그러하며,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그러하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며, 나아가서는 걸어가고 서 있거나, 않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고 성낼 때에도 언제든지 그러하다 마치 빈배가 물결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을 끼고 돌 때에 병세에 따라 굽이 돌고 바르게 흐르기도 하는 것처럼 마음마다 알음알이가 없다.
그러하여 오늘도 무심하여 자유롭고 내일 도 무심하여 자유로워서 가지가지 반연을 따라도 아무런 걸림이 업고, 약을 끊거나 선을 닦지도 않는다.또한 순박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어서 보고 들음에 무심함으로 한 티끌도 상대된는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털어없애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한 생각의 망령된 정도 일어나지 않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 쓸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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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번뇌는 두텁고 습기는 무거우며,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어, 선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없애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근이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음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함께 공하여 미혹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이것이 비록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로써,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지만 대치하는 문에서는 없을 수 없다. 만약 망상이 들끓거든 먼저 선정의 이치대로 산란을 거두어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 고요함에 계합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많으면 지혜로써 사물을 판단하고 공을 관하여 미혹함이 없음을 비추어 보아 본래의 앎에 계합하도록 한다.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멍청함〔無記〕을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것도 끊어지고 대치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경계에 대하여 생각 생각이 근본으로 돌아 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걸림없이 쌍으로 닦아야 일없는 사람〔無事人〕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져 불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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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 스님께서 말씀한 바에 의하면, 깨친 후에 닦는 문에 선종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뜻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며, 둘째는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자기 성품의 문은 ‘걸림없는 고요함과 앎이 원래 무위여서 한 티끌도 대를 짓지 않으니 어찌 털어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며, 한 생각의 망념된 정도 일어나지 않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 쓸 것도 없다’고 하고 판단하여 이르시기를 ‘이것이 돈문에 들어 간 사람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 하셨습니다.상을 따르는 문은 ‘이치에 따라 산람함을 거두며 사물을 판단하고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판단하여 이르시기를 ‘이것이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선정과 지혜에 관하여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는 수행이라면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닦은 후에 다시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의 노력을 해야 됩니까?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문에 의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후에 자기 성품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만약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고요함과 앎이 자재하여 다시 대치의 노력이 필요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마치 흔 옥에 무늬를 새겨 그 바탕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먼저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로서 대치하는 노력을 완성한 후에 자기 성품의 문에 나아간다면, 그것은 완연히 점문의 열등 근기의 깨치기 이전의 점차 익히는 것이니 어찌 돈문에 들어가는 사람의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노력없는 노력을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만일 동시여서 전후가 없다면,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가 돈과 점이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아울러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즉 돈문의 사람들은 자기 성품의 문에 따라 걸림이 없고 자유로워 노력할 것이 없고, 점문의 열등한 근기는 상을 따르는 문에 나아가 대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두문의 돈과 점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어떻게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문 가운데에 두 가지를 아울러 말씀하십니까? 다시 잘 설명하시어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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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더 생기고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질문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두 문에 관하여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사람은 돈문에서 노력없는 노력으로 움직임과 고요함을 함께 하여 자기의 성품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사람은 깨치기 전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대치하는 노력으로 마음마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 사람이다. 이 두 문의 수행은 돈과 전이 각각 다르니 혼동하면 안된다. 그러나 깨친 후에 닦는 문에서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함을 아울러 논한 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닦는 것을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임시로 쓸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둔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사람과 근기가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 가지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고 여덟 가지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세 가지 느낌까지도 빈 사람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의지하여 자유롭게 겸해 닦으면 천진하여 조작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이어서 자연한 이치를 이룰 것이니 어찌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하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먼저 돈오하였으나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함에 망정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반연을 만남에 대를 짓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서 혼침과 산란에 떨어져, 항상 고요하고 밝게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곧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빌려 대치함을 잊지 말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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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치하는 공부를 빌려서 잠깐 습기를 다스리지만 이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는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에 물들은 수행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이 깨치기 전에 있으면 비록 잊지 않고 노력하여 생각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 의심을 일으키어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언제나 앞에 나타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치하는 노력이 익으면 몸과 마음과 객관 대상이 편안한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하다 하더라도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음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한다.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으나 생각생각에 의심이 없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가면 자연히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계합하여 자유로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생각에 일체의 모든 경계에 반연하면서도 마음마음에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져 위없는 보리를 이루어 앞에 말한 근기가 수승한 사람과 아무 차별이 없게 된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가 비록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닦음이지만 깨친 사람이 경지에서 보면 쇠로 금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안다면 어찌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차례가 있다고 두 가지 견해의 의심을 가질 것인가. 바라건대 모든 도 닦는 사람은 이 말을 잘 연구하고 음미하여, 다시는 의심하여 물러서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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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장부의 뜻을 갖추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뜻을 바로 알아 일일이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하면 곧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히 나타나고 천진한 이치가 분명히 드러나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깨친 것이 아니다. 이 묘한 뜻이 비록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긴 하나 일찍이 지혜의 씨를 심은 대승의 근기가 아니면 능히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니,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여 무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도 허다히 많다.
그러나 비록 믿어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한 번 귀를 스쳐 잠시라도 인연을 맺으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유심결」에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될 인연을 맺고, 배우고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사의 복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도 성불할 바른 인(因)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루어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공덕이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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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 보면 몇 천겁 동안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 지옥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여 그 얼마나 오랜 겁을 나고 죽는 바다에 빠진 채 깨치지 못하여 온갖 악업을 지었던가.
때때로 한 번씩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긴 한숨이 저절로 나오니, 어찌 또 게을리 지내어 지난날의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또 누가 나로 하여금 이제 인생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진리의 길을 닦도록 하였는가.
실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씨가 바늘에 꽂힘이니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제 만일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 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도에 떨어져 갖은 괴로움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한 구절 불법을 들어서 믿고, 알고, 받들어 고통을 면하려 해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을까. 위태로운데 이르러서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원컨대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살피고 돌아보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지는 해와 같다.
오늘은 비록 살아 있다 하나 내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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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유위의 선을 따라도 또한 삼악도의 괴로운 윤회를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수승한 과보를 얻어 온갖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의 깊은 법문이겠는가. 잠깐만 믿더라도 그 공덕은 가히 어떠한 비유로도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모든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고(四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이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그릇 밥 먹는 잠깐동안 만이라도 이 법을 바로 생각하여 얻는 공덕만은 못하다’하셨다.
이로써 우리의 이 법문이 가장 귀하고 가장 높아 다른 어떤 공덕에도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이니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은 한량없는 수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칠보의 탑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하셨다.
원컨대 수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말을 깊히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지금 만약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나고 지금에 힘써 닦으면 어려운 수행도 점차로 어렵지 않게 되어 공행이 저절로 나아갈 것이다.
슬프다! 지금 사람들은 배고프면서도 맛있는 왕의 음식을 보고 먹을 줄을 모르며, 병들어 앓으면서 제일가는 의사를 만나고도 약 먹을 줄을 모른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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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세상의 유위의 일은 그 형상도 볼 수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얻어도 그 희유함을 찬탄한다.
그러나 이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으므로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마와 외도들이 훼방하려 해도 길이 없고 제석천과 범천 등 모든 하늘들이 칭찬하려 해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하물며 얄팍한 범부들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우물안 개구리가 어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외침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한 생각을 내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동안 모든 성인을 받들어 섬겨서 모든 선근을 심고 지혜의 바른 인연을 깊히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은 이임을 알 수 있다’하였고, 또 ‘이 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이와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고 하셨다.
원컨대 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부디 용맹스런 마음을 낼 것이니 숙세에 얼마나 거룩한 인연을 맺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수승한 근기를 믿지 않고 하열함을 달게 받아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지금에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의 선근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이제 끊는 것이므로 더욱 어려워지고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회복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부디 삼가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보배가 있는 곳을 알면서 구하지 않다가 오래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하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으려거든 그 가죽 주머니를 놓아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