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동자(文殊童子)와 어사 박문수
하동(河東)땅에 암행 순시차 온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가 화개동천(花開洞天)의 1백여 사암을 폐사할 구실을 찾으려고 칠불암을 찾았는데 절에는 스님들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기에 괴이쩍게 생각한 그가 두리번 거리다가 아자방(亞字房)을 발견하고는 그 곳으로 가서 문을 열어 젖히니 이 때 어느 한 동자(童子)가 나타나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에다 손가락을 갖다 대고 제재를 가하였다. 그런데 이미 열려진 방문 안에는 마침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끼만 식사하는 것을 말함)인 점심 공양을 마친 후라 참선하던 스님들이 각양각색의 자세로 졸고 있었다.
박어사가 그 중 고개를 뒤로 젖히고 조는 스님을 바라보니 동자는 이러한 참선자세는 앙천성숙관(仰天星宿觀)이라 말하는지라 속으로는 크게 웃으며 한 쪽을 보니 고개가 무릎에 닿도록 떨구어 조는지라 이 자세는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지하망명관(地下亡冥觀)이라 했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자세는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 방귀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는 타파칠통관(打破漆桶觀)이라 이름하니 어느 한가지라도 참선자세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박어사는 어린 동자승에게 법문만 잔뜩 듣고 하는 수 없이 이 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 닷새 뒤 박어사는 하동현감과 함께 스님들의 신통력을 시험할 한 가지 계책을 짜냈다. 몇 일이 지난 뒤 하동 관아에서 박어사로부터 칠불암 선방 스님들은 재주가 비상하니만큼 각자 목마를 타고 관아의 동헌앞 마당을 한 바퀴씩 돌라는 출두 통지가 날아 들었다. 나무로 만든 목마를 타고 달리지 못하면 절을 폐쇄하고, 달리면 선량(禪量, 절의 양식)을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하동 현감의 출두통지를 받은 스님들은 모두들 걱정을 하다가 출두당일 관아마당에 모였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함께 온 동자승이 안장도 없는 목마등에 올라 타고 목마의 궁둥이를 힘껏 내리치자 목마는 소리를 크게 지르며 동헌 앞마당을 몇바퀴 돌았다. 이에 놀란 박어사는 칠불암 스님들을 극진히 대우해 돌려보내고 아자방에 두꺼운 장판을 다시 깔아 주었다 한다.
이 날 동자승은 절에 거의다 와서는 “ 스님네들 어떻게 하든지 공부 열심히 하시고 수도에 전념하셔야 됩니다”란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일행들은 동자승이 문수보살의 현신임을 알고 문수동자가 사라진 곳에 동자부도를 세워 기념했다고 한다. 이 동자부도는 현재 일주문 아래 초의선사다신탑비(艸衣禪師茶神塔碑_가 있는데, 거기서 조금 아래 남동쪽으로 약 30미터 거리에 있다.
동자부도
이 부도는 또다른 전설을 내포하고 있어
일명 소년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