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큰 법은 점차 쇠퇴하고 가신 성인과는 더욱 멀어지니 승복을 걸친 이는 비록 많으나 도를 도모하는 자는 더욱 드물다. 명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을 자기의 능사로 삼고 바른 법이 흐르고 소통되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이들의 유희로 여기니 마침내 불법의 문이 드물게 열리게 함으로써 가르침의 규범이 곧 무너지려 한다. 진실로 뒤를 잇는 이에게 의뢰하려면 능히 이 도를 짊어져야 할 것이니, 너희들은 마음을 비우고 법을 들으며 몸을 깨끗이하여 스승에게 의지함으로써 가까이로는 몸을 세워 이름을 드날릴 것을 기약하고 멀리로는 범부의 품성을 개혁하여 성인의 품성을 이루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상법像法을 꽃피워 드날리고자 함에 그대가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몸을 닦고 말을 실천함에 끝까지 삼가기를 마치 처음과 같이 하라.
배우고 묻기를 부지런히 하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에 삼갈 것이니, 못된 벗 피하기를 마치 호랑이 피하듯 해야 하고 어진 벗 섬기기를 마치 부모 섬기듯 해야 한다. 스승을 받듦에 예를 다하고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으며, 선행이 있으면 스스로 자랑함이 없어야 하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속히 고칠 것을 힘써야 한다. 인의仁義를 지킴에 확연히 흔들리지 않고 빈천貧賤에 거처하되 즐거움으로써 근심을 잊으면 자연히 재난과는 떨어지고 복록과는 모이게 될 것이니, 어찌 관상을 보고 운명을 물음으로써 영달의 시기를 아첨하여 구할 것이며 날을 선택하고 때를 가림으로써 막히고 어려운 운세를 구차하게 면하기를 빌겠는가. 이것이 어찌 사문의 원대한 식견이리요, 실로 오직 속인의 망령된 뜻일 뿐이다. 마땅히 현인을 보면 그와 가지런해 질 것을 생각하고 어진 일을 당면해서는 양보하지 말아야 하며, 설산의 구법求法을 사모하고 선재善財가 스승을 찾던 일을 배우라.
명예와 이익은 가슴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며 삶과 죽음은 족히 근심할 바가 아니다. 만약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니, 이름을 팔지 않아도 이름은 스스로 드날려질 것이며 대중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대중이 스스로 올 것이다. 지혜가 풍족함으로써 의혹을 비출 수 있고 자비가 풍족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궁핍하면 곧 홀로 그 자신만을 착하게 하고 통달하면 곧 천하까지 겸해서 착하게 하여 잠잠하던 참된 교화의 바람을 다시 떨쳐 일어나게 하고 꺼졌던 지혜의 횃불을 다시 밝게 밝힌다면 가히 대장부라 일컬을 것이며 가히 여래의 사자라 일컬을 것이다. 어찌하여 몸은 강의하는 자리에 깃들어 있되 자취는 범상한 무리와 뒤섞여 있으며, 더럽고 추악한 곳에 있으나 조금도 그렇게 여기는 바가 없으며, 수행과 견해에 있어서도 가히 두려워할 만한 것을 볼 수 없으며, 나아가 그러한 습성을 쌓아 성품을 이루기에 이름으로써 그 몸을 스스로 멸하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저 위의 현인들을 사모하다가 결국에는 아래로 추악함에 빠짐을 보이니 이와 같은 무리는 진실로 슬플 뿐이로다.《시경》에 이르기를 「‘처음’은 있지 아니함이 없으나 능히 ‘마침’이 있는 것은 드물다」 하였으니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니, 중간 근기의 사람 이상은 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계戒와 혜慧가 종파를 나누고 대승과 소승이 배움을 달리하나 모두 부처님의 마음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니 뜻을 법계法界에 두고 모두 함께 돌아가야 한다. 아직까지 큰 법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각기 근거하는 바를 고집하여, 경론을 익히면 곧 계학戒學을 쓰레기로 취급하고 율부律部를 으뜸으로 삼으면 곧 경론을 헛된 곳에 기대는 것으로 여기며, 대승을 익히는 자는 곧 소승을 멸시하고 소승을 듣는 자는 곧 대승을 업신여기며, 단지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한 이의 치우친 찬사만 보고 마침내 그것에 집착하여 서로 옳고 그르다 하고 있으니 어찌 부처님의 뜻은 항상 원융무애함을 알겠는가. 진실로 그것을 통달하여 이것과 저것을 함께 보지 못한다면 응당 서로를 구제해 줌으로써 함께 [불법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와 인연을 성숙시켜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1만 줄기의 물줄기가 머리를 조아림에 바다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으며 문무백관이 일에 임함에 모두들 왕을 위해 힘 쓸 것이라 일컫는 것과 같다. 한 가닥 물줄기를 보호하고자 여러 물줄기를 막으려 한다거나 하나의 벼슬을 지키고자 수많은 벼슬을 폐지하려 한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 본디 무릇 법왕이 교화를 드리움에 여러 종류의 중생들을 통괄하여 끌어안고자 각각에 소임所任을 두었으니, 소승의 율律은 예부와 형부의 권위에 비견되고 대승大乘은 재상의 임무와 비슷하며 복을 짓는 일(營福)은 배나 수레를 조종하는 것과 같고 서적을 찬술하는 일(製撰)은 마치 왕의 말을 관장하는 것과도 같다. 나라에서 모든 벼슬아치가 함께 자신의 직분을 닦는 것은 우리 불교의 여러 종파들이 다투어 포교하는 것과 유사하니 과연 이 취지를 밝히면 어찌 이단異端임을 고집하겠는가. 응당 모름지기 자기의 재능을 가늠하고 능력에 따라 포교할 것이니, 성품이 민첩하면 곧 겸하여 배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고 지식이 얕다면 곧 오로지 하나의 부문만 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각각 교화와 법도를 전파하더라도 함께 자비로운 구제를 이루어서 같이 화합의 바다로 돌아갈 것이며 함께 해탈의 자리에 앉을 것이니, 무릇 이와 같다면 곧 참으로 미로의 나침판이며 교문敎門의 목탁일 것이다.
스승의 지위에 자리하여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가 없으면 불과佛果에 나아가는데 결정코 의심스럽지 않으리니, 너희는 작디작은 견해와 지식을 자랑하거나 크디크게 나의 거만을 세워서 선각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뒤에 오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록 말하기를 [옛 말을] 듣고 [옛 글을] 찾아보는 것이 허물을 보완하지 못한다 하지만 말 가운데 혹시라도 맞는 것이 있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생각하라.